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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 (Hundred Years War, 1337 ~ 1453)

Doggy★ 2026. 3. 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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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이란, 정확하게는 116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왕위 찬탈 전쟁을 가리킨다.

1066년 윌리엄 1세에 의해 영국에 노르만 왕조가 세워짐과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 내부의 영토를

일부 소유하게 되었다. 프랑스 서부 기옌(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참고 : 기옌지방은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로, 프랑스는 항상 이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서거하게 되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 가(家)'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하였다.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모친이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모친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의 대립이 고조되었다.

프랑스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플랜더스)에 독점하다시피 수출해 오던 양모의 공급을 중단하였다.

(참고 :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에 들어서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써 번성한다. 때문에 양모의 최대 공급국이었던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당시 영국령이었던 기옌지방의 몰수를 선언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백년전쟁의 제 1기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직접적인 전투는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1340년 영국의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슬로이스 해전) 통상적으로 선상싸움을 하던 시기에 장궁병을

활용하여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였고,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를

데리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 전투에서 장궁대를 활용하여 당시

영국군보다 우세하리라 여겼던 프랑스 기사군을

격퇴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市)로 진격해

완전히 포위한 뒤 공격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 뒤 양국에 페스트(흑사병)가

돌고, 재정상태도 악화되어 전쟁이 잠시 중단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프랑스를 침공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서, 더군다나 전장이 프랑스이기 때문에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가혹히 진압하고,

프랑스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때문에 날로 피폐해진 농민들은, 1358년 농민반란인 자크라의 난

일으킨다. 이 반란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즉시 진압되지만, 프랑스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360년 흑태자가 모펠튜이의 언덕에서 또 다시 우세가 점쳐졌던 프랑스 기병을 격파하고, 장 2세의 넷째 아들까지 포로로 잡아들임에 따라, 양국은 샤르트르 근교 브레티니에서 휴전 협정을 맺는데, 이를 브레티니 화약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석금으로 300만 크라운(1크라운은 5실링에 해당)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 등의 영토를 영국에 할양하기로 하였다.


백년전쟁의 제 2기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후에 현명왕이라고도 불림)가 즉위하였다.

샤를 5세는 내정의 정비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 지방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의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영국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패전하였다. 따라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할양되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1375년 부뤼지(Bruges)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13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자였으며, 영국에서는 1381년 W.타일러의 난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 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게 되었다.

 

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랭커스터가(家)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상태에 빠졌다.

(참고 : 영국과 프랑스는 후에 아쟁쿠르트 전쟁을 일으킨다. 이 때 부르고뉴파는 영국군을 지지하였으며

영국의 왕위 요구를 지지하고 나섰고, 아르마냐크파는 프랑스의 왕을 지지하였다)


백년전쟁의 제 3기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에 상륙, 아쟁쿠르트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참고 : 아쟁쿠르트는 북프랑스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아쟁쿠르트 전투는 1415년 10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칼레를 향해 북상해 온

헨리 5세의 영국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양 군의 병력은 영국군 약 6,000여 명, 프랑스군 약 2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먼저 영국군 보병이 프랑스 기병대를 꾀어내고, 이에 대응한 프랑스군이 전면으로 진출했을 때

영국의 궁노수가 공격하여 기병들을 말에서 떨어뜨리고 보병이 돌격함으로써

영국군은 병력이 우세한 프랑스군에게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전사자와 포로가 약 7000여 명인데 비하여 영국군은 1600여 명이었다.

이 전투 후에 영국군은 칼레시를 점령하였고, 아르마냐크파는 쇠퇴하였으며,

북프랑스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헨리 5세는 이를 바탕으로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참고 : 트루아 조약

첫째, 영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 왕녀 카트린과 혼인을 맺고,

둘째, 프랑스는 지참금으로 영국왕에게 백합 꽃의 왕국을 증여하며,

셋째, 영국왕은 현재 샤를 6세의 재위 중 섭정권을 인정받고,

샤를 6세가 사망할 시 계승권을 가진다.)

당시 영국군과 협조한 프랑스의 왕비 이자보와 부르고뉴파는 이 조약으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억지로 카트린의 오빠 샤를(후에 샤를 7세)을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시켰다.

파리 고등 법원, 그리고 파리 대학도 이 조약을 인정 하였으나,

샤를 7세 및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프랑스 중남부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의

두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고 선언하였다.

 

잔 다르크 (Janne Da Ark)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샤를 7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잔 다르크'였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뒤로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 조약은 흐지부지되고, 이듬해인 1430년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전황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1435년 분쟁을 계속하던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전은 종식되었다.

 

그 후에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1445년까지도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샤를 7세는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에선 랭커스터 왕가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의 반란(장미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샤를 7세는 이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이었던

보르도시를 공격, 점령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다.

 

영국의 패인은 영국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로 인한 프랑스인들의 반영감정 고조와,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 사실상 전쟁이 끝난 것으로 본다.


의의


프랑스 :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봉건귀족의 세력이 극도로 약해진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상비군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영국 : 백년전쟁이 끝난 뒤 왕위 문제를 둘러싸고 30여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1485)이 일어났다.

이것은 귀족들의 세력 다툼이기도 하며, 오히려 그들이 모두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튜더 왕조의 중앙집권화를 굳혀주었다. 또한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내의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전혀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해서 기술직 주민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 본토로 이주함으로써,

영국은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를 다듬을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백년전쟁은,

봉건귀족의 세력과 기사계급의 몰락,

농민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강화 등을 초래하였다.

이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후에 절대왕정이 성립되는 데에 일조한다.

 

 

 

요약

 

* 전쟁

1337 영국 에드워드 3세 선전포고

1340 슬로이스 해전 (라인강의 하구)

1347 영국 칼레시(市) 장악

1355 영국 흑태자 남프랑스 침공

1356 푸아티에 전투 (흑태자 VS 장 2세)

1358 프랑스 자크라의 난

1360 모펠튜이의 언덕 흑태자 승리

1381 영국 W.타일러의 난

1415 아쟁쿠르트 전투 (헨리 5세 VS 프랑스)

1450 프랑스 노르망디 회복

1453 프랑스 보르도 점령

* 조약

1360 브레티니 화약 (영국, 프랑스)

1375 부뤼지 협정 (영국, 프랑스)

1420 트루아 조약 (영국, 프랑스)

1435 아라스 화의 (부르고뉴파, 아르마냐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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