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C. 490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리트레아를 정복하기 위한 두번째 그리스 원정을 개시했다. 다티스를 사령관으로 한 2만명의 정예 페르시아군 앞에 에리트레아는 단 6일만에 함락되었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기 위해 그리스 남부 아티카 지역의 마라톤에 상륙한다. 아테네로 가지 않고 마라톤에 상륙한 이유로는, 첫째로 아테네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상륙해 모두 짓밟아버릴 경우, 아테네의 수많은 동맹국가들의 반감을 살 것이고 이는 팽창정책을 펴고 있는 페르시아의 이후 외교 사정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우선 아테네의 서남부에 상륙해 대군을 보여주고 그리스 동맹의 내부분열에 기대어 전쟁을 쉽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둘째로는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당시 병종 차이에 있는데, 둔하지만 강력한 중보병인 팔랑크스를 운용했던 아테네와 경기병과 경보병 위주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페르시아였기에 페르시아는 넓은 평야에서의 유리한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병력을 보유한 페르시아군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울 수 있었기에 전쟁 양상은 분명 페르시아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테네는 약 1만 1천명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아테네 시민과 노예, 외국인들을 싹 다 긁어 모아서 편성한 아테네군 1만과 플라타이아 군 1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예군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공격과 수비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마침내 군대 지휘를 담당하는 문관 칼리마코스가 공격을 주장하여 칼리마코스를 총 사령관으로 하고 밀티아데스 등을 지휘관으로 한 1만 1천명의 병력이 2만명의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정예 페르시아 기병들과 정직하게 맞부딪쳐 이길거라는 기대는 없었기 때문에, 언덕에 진을 치고 나가지 않았다. 계속되는 대치 상황에서 식량이 고갈되어가던 원정군 페르시아는, 5천 명의 병사를 배에 태워 텅 빈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테네 병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텅 빈 아테네에는 병사들의 가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잡혀있으면 아테네가 멸망할 것이다. 게다가 5천명의 병사가 빠져나가 조금이라도 덜 불리한 이때, 아테네군에게 총공격을 지시한다.
B.C. 490년 9월 12일, 총 공세로 나선 아테네군과 페르시아 간의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다. 아테네군은 이 전투를 얼른 끝내고 아테네로 돌아가 5천의 병력을 수비해야 할 동기부여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절실했다. 가족을 지켜야 하기 떄문이다. 아테네 군은 중앙에 보병을 길게 배치하고 양 날개에 최정예군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중앙은 밀렸으나 곧 양 날개의 최정예 부대가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전열이 붕괴한 페르시아군 우익은 지형에 대한 무지로 인해 대습지 방향으로 도주했다가 전멸당하고, 중앙과 좌익은 함대로 도주에 성공한다. 함대 정박지에서도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지만 아테네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의 진수를 막지 못한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군의 전사자는 약 200명, 페르시아의 전사자는 약 6400명으로 추산된다. 아테네의 사령관 칼리마코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유명한 이야기로, 그리스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승전보를 전한 뒤 쓰러져 죽었다는 일화에서 현대의 올림픽 종목인 '마라톤'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원래 이 전령은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전령이었으며 240km의 거리를 단 2일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또한 임무를 마치고 멀쩡하게 생존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원래 군의 연락병이며, 정말 대단한 체력이긴 하지만 원래 그런 일을 도맡아하는 병사였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실제로는 페르시아가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공격하러 가는 것을 막지 못한 아테네 전군이 자신들의 집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30kg의 장비를 메고 30km나 떨어진 아테네까지 3시간만에 주파하였다는 것이다. 방금 막 전투를 끝내 지치고 피곤한 병사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하면 가족과 집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일념 하에 그 거리를 쉬지 않고 정신력으로 달린 것. 함대를 이끌고 온 페르시아군은 먼저 도착한 아테네군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후퇴했다고 한다.
위의 널리 알려진 전령 이야기는, 올림픽을 만들 때 감동적인 스토리로 어필하기 위해서 각색된 것이라고.
이 전투의 패전국인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는 현대 이란의 역사로 편입되어 있으며, 이란 또한 올림픽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단 자국에서 열린 1974 테헤란 올림픽에선 마라톤을 제외했다.

마라톤 평원의 모습
<의의>
마라톤 전투는 B.C. 499년부터 44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서도 B.C. 490년에
벌어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B.C. 490년 9월 12일에 치뤄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거둔 대승을 통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무적의 군대라 여겨졌던 페르시아 군대 또한 패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페르시아의 막강한 군사력에
짓눌려있던 여러 국가와 폴리스들이 델로스 동맹쪽으로 힘을 실어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테네는 기존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폴리스였으나 그 기세에 날개를 달게 되었고,
다른 폴리스들은 상대적으로 아테네의 지배력 하에 놓이게 된다. 그 지배력을 이용해 아테네는
지중해의 강자가 되어 동맹국들의 군사 자금을 반강제로 관리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그 자금을
아크로폴리스를 짓거나 아테네 시민들의 유흥을 위해 소비하고, 아테네의 강력한 힘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는 여러 폴리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이후 일어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을 만들게 된다.
<주요 인물>
그리스 동맹 측
칼리마코스
밀티아데스
아케메네스 측
다리우스 1세
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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