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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Doggy★ 2026. 3. 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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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 Sakyamuni / 釋迦牟尼>

이름 : 고타마 싯다르타 (Gautama Buddha / 瞿曇悉達多 / सिद्धार्थ गौतम)

                                                   영어 / 한자 / 산스크리트어

생몰 : B.C. 563 ~ 483

국적 : 샤카국 룸비니 (고대 인도 / 현재의 네팔)

별칭 : 부처, 불타(佛陀), 여래(如來), 세존(世尊), 각자(覺者)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로, 산스크리트어인 샤카무니(Sakyamuni)를 음역한 것으로,

샤카무니란 샤카(석가)족의 성자, 또는 샤카족의 고행자라는 뜻이다.

가장 대표적인 호칭은 '깨달은 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붓다(佛陀, 불타), 즉 부처이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부처 중 가장 유명한 부처일 뿐, 불교 교리 하에서는

석가 이전에도 부처가 존재했고 석가 이후에도 부처가 존재한다.

출신은 고대 인도의 소왕국인 가바라(카필라)위성국 영주의 아들.

인간의 삶이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사문(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모든 고통과 근심이 없는 해탈에 들어서고자,

29세에 출가하여 진리를 찾기로 결심하고 바라문 학자들을 찾아가 6년간 고행을 한다.

지나친 고행으로 쓰러진 뒤 다른 방도를 모색하는데, 부다가야라는 곳에서 아사타 나무(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앉아 49일간 명상, 삶과 죽음을 초월해 열반(Nirvana)에 이르는 길을 이해하고

35세에 불교의 기본 교의를 성립한다.

<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

- 사성제 (四聖諦) : 고집멸도의 네개의 성제.

- 고성제(苦聖諦·Dukkha) : 모든 사람은 살아가기 때문에 괴롭다. 팔고(八苦).

생고(生苦): 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거나, 존재를 시작하여야 하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

노고(老苦): 세월에 따라 늙거나 낡게 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

병고(病苦): 병들거나 고장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

사고(死苦): 죽어 사라지는 괴로움. 혹은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함에서 오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고 애욕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과 함께해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탐하여 구하여도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데서 오는 괴로움.

오음성고(五陰盛苦):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에 집착해 생기는 괴로움.

- 집성제(集聖諦·Samudaya) : 괴로움의 원인

- 멸성제(滅聖諦·Nirodha) :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아 열반에 이른 상태

- 도성제(道聖諦·Marga-satya) : 수도를 통해 열반에 이르는 과정 (명상, 冥想)

→ 아라한(궁극의 꺠달음을 얻은 사람)이 되어 다시는 윤회에 빠지지 않음

- 무아 (無我) : 한 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변(變)하여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됨.

- 탐진치(貪嗔癡) : 탐욕, 성냄, 어리석음.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될 것을 말한다.

- 동굴에서 떠나라 :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한 것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동굴'에 비유하였다. 탐욕, 집착 경계

- 내가 옳다고 남을 비난하지 마라 : 성냄을 경계

- 완벽한 순수를 찾지 말아라 : 어리석음을 경계

- 최고를 생각하고 비교하지 말아라 : 괴로움을 경계

- 공(空) :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은 즉 공이요, 공은 즉 색이라, 두 극단에 있는 것도

결국은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같이 존재해야 한다. 쉽게 말해,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이 있기 때문에

피부가 하얀 사람은 피부가 까만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

그 의미를 확장시키면 모든 삼라만상은 원인과 결과로 묶여있다.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

- 오온과 카르마 :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오온/五陰)

즉, 오온 = 아트만(영혼 : 수+상+행+식) + 육체(색)이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인과응보의 개념

- 일체유심조 :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

ex) 해골물

< 불교의 전파 >

붓다는 힌두교 중에서 유용한 내용을 받아들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웠다. 신도, 성전도 없었기 때문.

수많은 승려들이 불교를 널리 알려 아시아 전역에 퍼졌다. 크게 남북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남방불교(소승)는 B.C. 3세기 경 스리랑카에 전해졌고 1c 초에는 참파(인도차이나/베트남)까지,

6세기에는 부남(캄보디아), 미얀마까지 전파되었다. 북방불교(대승)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전해졌고, 약 552년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8c 경 불교는 많은 국가들의 국교가 되었는데, 정작 본국 인도에서는 5c 경에 이르러서야 일어났으며 13c 초 부터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 석가모니의 가족 >

여담으로, 과거현재인과경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출가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먼저 부왕 숫도다나를 찾아가서 뜻을 밝혔다. 아무리 속세와 연을 끊는 마당이라도 지금까지 자신을 보살펴 기르신 부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출가를 막자고 기울였던 온갖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던 숫도다나 왕은 "아들아,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아직 때가 아니다. 아직 어린데 출가해서 고행하는 그 고된 삶을 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니. 내가 이제 늙어서 곧 있으면 너한테 양위하고 한적한 데에서 고행할 생각인데, 제발 한 번만 생각 다시 해다오. 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여기서 말해라. 네가 출가하지 않겠다면 내가 뭐가 아깝겠냐."라고 달랬다. 싯다르타가 "아버지께서는 그럼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것, 병들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 서로 이별하지 않는 것, 이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묻자, 숫도다나 왕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떠올리고는 "그래, 네가 결정했다면 내가 어쩔 수 있냐. 정 그렇다면 이 나라 왕위를 이을 후사 하나만 낳고 나서, 그러고 나서 네 뜻대로 출가해라." 하고 말했다. 싯다르타도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얼마 전 아내 야쇼다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에 석가모니는 자신을 묶는 인연이 하나 더

생긴 것을 탄식하여 '라훌라(장애물)'이라고 중얼거렸는데, 시종은 이를 아기의 이름으로 알고 태자비에게 알렸다. 아들이 태어날 때 일식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양을 가리는 장애물이라는 의미로 라훌라라고 지었다는 말도 있다.

싯다르타는 후사가 생겼으므로 아버지와의 약속이나 왕자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판단과 함께 더 이상 지체하면 출가가 미루어질 것이므로, 모두가 잠든 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서양에서 석가의 출가는 The Great Renunciation, 즉 '위대한 포기'로 불린다.

야쇼다라는 석가모니가 부처가 된 후에, 라훌라에게 아버지를 찾아가 유산(왕위 계승권)을 물려달라 하라고 시켰다. 이에 석가모니는 "나의 유산은 너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니 법의 유산을 물려받아라."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제자 사리푸트라를 라훌라의 스승으로 삼고 출가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세속에 돌아가지 말거라"고 간곡히 말한다. 라훌라도 출가하게 되어, 왕위는 석가모니의 사촌 마하나마가 잇게 되는데 이후 코살라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라훌라는 십대제자 중 '밀행제일'로 불리는 사람이 되는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음을 닦고 선행을 하는 밀행을 일생동안 행함으로써 훗날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밀교의 주요 개조로 존중받았다. 가장 눈에 띄지 않게 정진한 라훌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처의 친아들이라는 고귀한 태생 때문에 출가 직후부터 차기 법왕(法王)으로 주목받고 그 탓에 한때는 교만도 심해서 장난을 쳐도 부처 외에 아무도 제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쭐한 인물이었다. 가장 고귀한 태생으로서 가장 주목받던 부처의 친아들이 가장 눈에 띄지 않게 정진하기로 제일이 되는 이 역설은 그만큼 라훌라가 그런 교만을 버리고 온전히 거듭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석굴암에도 석굴암 본존불을 둥글게 둘러싼 십대제자로서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위치는 본존불을 앞에서 바라봤을 때 뒤쪽 오른쪽 1시 방향이다. 다른 아홉 제자들의 부조는 전부 본존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인데 라훌라는 부처의 친아들이라서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조각했다고 한다.

라훌라를 시작으로 석가모니의 계모 겸 이모인 마하파자바티와 아내 야쇼다라도 출가했는데 둘은 여승(비구니와 사미니) 교단을 이끌면서 존경받았다.

< 석가모니의 열반 >

석가모니의 사망은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순간이자 그의 인생과 모든 설법을 총망라하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다. 상좌부 불교에서 전해지는 열반경(디가 니까야 16)은 대중부 불교에서 전해지는 열반경과 달리 석가모니 부처에게 마가다국의 아자세사트루 왕이 대신 바르사카라를 보내 바이샬리에 거점을 두고 있던 밧지족의 나라를 멸망시킬 방법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이때 석가모니 부처는 옆에서 자신을 따르고 있던 아난에게 밧지족의 모습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한다.

  • 밧지족은 자주 모임을 개최하고 그 모임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모일 때도 의기투합하여 모이고, 헤어질 때도 뜻을 모으고, 또한 일족의 행사도 뜻을 모아 거행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새로 정하거나, 반대로 이미 정해진 것은 깨뜨리지 않고, 과거에 정해진 일족의 옛 법대로 행동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나이 든 이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며, 나이든 어른의 말을 경청하고자 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양가의 부인이나 여자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그들의 성(城) 안팎에 있는 밧지족의 성지를 경애하고, 존중하고 숭배하고 공양하며 아끼고 봉납하는 제식(祭式)을 폐하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런가.
  • 밧지족은 존경받을 만한 아라한(阿羅漢)에 대하여 법에 적합한 대우를 해드리고자 능히 마음을 기울이고, 또한 아직 자기 나라에 오지 않은 존경받을 만한 이가 있다면, 그가 자기 나라를 찾아오도록 노력하며,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이들이 찾아오면 마음 편히 머물도록 항상 기원하고 있다는데, 정말 그런가.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묻는 일곱 가지 밧지족의 풍속에 대해서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고, 석가모니는 그때마다 "그러한 풍속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밧지 족에게는 번영이 있을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돌려보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가 밧지족을 치려는 아자세사트루 왕의 자문 요청을 정중하게 돌려보낸 것은 석가모니 자신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종교 지도자로서도 온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석가모니 자신이 바이샬리라는 도시를 마음에 들어했고(아닌 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출가해서 처음 수행한 곳이 이곳이었다.), 이 바이샬리가 다름 아닌 밧지족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석가모니는 같은 내용의 설법을 영축산에서 행한 뒤, 영축산을 떠나서 죽림정사로, 다시 파릉성(巴陵弗城)으로, 다시 발지국의 구리촌(拘利村)으로, 나다촌(那陀村)으로, 그리고 비사리국(毘舍利國) 즉 바이샬리로 왔다.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유녀 암바팔리로부터 망고나무 정원을 희사받아(암라수원정사) 암바팔리에게 설법을 행한다. 법현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죽음을 석 달 앞두고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건다 마을로 가려던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조용히 웃었는데, 옆에서 이를 본 아난다가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 부처는 "내가 저 바이샬리를 보는 것이 지금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경에서는 이때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던 모습을 상왕회고(象王回顧) 즉 '코끼리가 자신이 태어난 숲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돌아온 것은 마가다 국의 죽림총(죽림정사)이었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는 온 나라를 휩쓴 흉년으로 제대로 공양도 받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곡식이 귀해져서 탁발도 어렵게 된 가운데 안거가 다가오자 석가모니 부처는 마가다 안에 있는 비구들에게 "이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구걸하기가 매우 어렵다. 너희들은 각각 무리를 나누어 아는 곳을 따라 비사리나 발지국으로 가 그곳에서 안거(安居)하도록 하라. 그러면 궁색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조언해 흩어 보낸 뒤, 자신은 아난과 함께 그대로 마가다에 머물렀다. 그리고 하안거 동안에 석가모니 부처는 병을 얻게 되었다. 바이샬리를 좋아해서 생의 마지막 안거도 바이샬리에서 했던 석가모니 부처는 그 무렵 바이샬리를 휩쓴 기근에 그 자신의 노쇠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명상으로 감관을 제어해 고통을 이기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는데 그래봐야 석가모니 부처가 당시 여든을 넘긴 나이였음을 생각한다면 아주 잠깐 동안의 회복이었다.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는 파바 성에서 금 세공업자 춘다에게 공양을 받았다. 이때 춘다가 올린 음식이 붓다가 받은 마지막 공양 '수까라 맛다와(sukaramaddava)'이다.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춘다의 수까라 맛다와 공양을 받고는 "이 음식은 붓다 이외에는 소화시킬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아무에게 주지 말고 버려라." 하고는 사람이나 동물이 접할 수 없도록 땅을 파고 묻으라고 지시했다. 숫까라 맛다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춘다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 먹고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자신이 먹은 것은 공양받은 음식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국 석가모니 부처는 이 음식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린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았다"고 불전에서 그리고 있을 정도.자신 때문에 부처가 아픈 것을 눈치 챈 춘다가 울자, 울고 있는 춘다에게 "걱정 말게나. 무릇 세상에는 훌륭한 보시가 둘 있다네. 하나는 정각을 얻으려는 자에게 행한 보시(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고 있었을 때 수자타가 공양했던 우유죽을 말한다.), 나머지 하나는 깨달은 자가 열반에 이르렀을 때 행하는 보시일세."라며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이는 춘다를 추켜올려 석가모니를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게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말에 춘다는 완전히 무너져내리며 더욱 큰 소리로 울었고, 아난은 우는 춘다를 달래며 "이 역시도 결국 운명이니, 어쩔 수 없소. 비구들이여, 부디 불쌍한 춘다에게 어떠한 원망도 하지 마시오. 이 역시도 결국 운명이오."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비구들을 진정시켰다.

석가모니 부처는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서 말라족의 땅 쿠시나가라로 가서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북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누웠다. 이는 서쪽을 보고 누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쪽은 해가 지는 땅으로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이집트의 ‘죽은 자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에서도 발견되는 고대인들의 공통된 인식 중 하나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아난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흘리는 이유가 절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웃긴데, 스승이 곧 죽음에 드는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이 석가모니 부처를 25년이나 모셨음에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죽음에 드신다니 그것이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알아챈 석가모니 부처는 아난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너는 내가 열반한 뒤에 머지 않아 반드시 깨달음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었고, 이에 아난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장례법과 탑을 세우는 위치와 주관자까지 세심하게 지시한 다음, 아난에게, 말라족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밤 수행을 완성한 위대한 성인이 열반에 든다.'고 알려주도록 했다. 당시 말라족 사람들은 마침 일이 있어 공회당에 모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구름같이 몰려나와 석가모니 부처의 발에 예배를 올렸다. 이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번거롭자, 아난은 한 사람씩 인사하지 말고 가족끼리 나와서 할 수 있도록 규칙을 수정하여 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말라족의 예배가 모두 끝나고 겨우 번잡함을 넘어선 안정이 찾아왔을 때, 수바드라라는 수행자가 석가모니 부처의 친견을 요구했다. 수바드라는 당시 120세(아시타 선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를 사용한 은유이다.)나 되었다는 말라족의 이름난 수행자였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미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 알았지만,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가서 묻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다고 하자,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허울을 벗고 진실한 무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석가모니 부처를 찾은 것이다.

아난다는 수바드라를 예배자가 아니라 논쟁하러 온 사람으로 여겨서 "당신은 너무 늦었소."라는 말로 친견을 막았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를 듣고는 아난에게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니 막지 마라. 그가 내 마지막 제자가 되리라."라며 수바드라를 불렀다. 석가모니를 만난 수바드라는 자신이 알고 경험한 수행의 가치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석가모니는 평생 없었던 행동, 그러니까 말을 중간에 끊는 행동을 하면서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 부족한 것만을 지시해 주도록 하겠다."라고 말했고, 수바드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석가모니 부처는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했던 것과 같은 주제의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준다.(이는 석가모니 부처 가르침의 본령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서 수미일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바드라는 그의 완성되었던 수행자였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자 곧장 깨달음을 얻었는데,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보다 먼저 열반에 들기를 희망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뜻대로 하라고 하자, 수바드라는 "당신을 만나 여한이 없소."라 상서로이 웃으며 열반에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석가모니 부처는, 제자들에게 최후로 더 질문할 것이 없는지를 물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고, 석가모니 부처는 다시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물어볼걸.' 하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물어보라."라고 재차 종용했지만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석가모니는 "내가 현재 열반에 가까웠다고 부담스러워서 못 묻는 것이라면, 친구의 일이라고 하면서 물어보라." 하고 다시금 말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다. 아난다가 "이 대중 가운데는 따로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사뢰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나도 그런 줄 안다. 이 대중들 중에 가장 어린 비구도 모두 도적(道迹)을 증득하여 악한 세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일곱 번을 오가고 나서 반드시 괴로움의 끝을 다할 것이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1200명 제자들에게 그들이 얻게 될 도과(道果)에 대하여 기별하고, 팔을 내밀어 모든 비구들에게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라. 여래가 가끔씩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마치 우담발꽃이 가끔 한 번씩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고 말한 다음, 게송을 읊었다.

오른팔은 자금(紫金)의 빛깔

부처의 나타남은 영서화(靈瑞華)와 같아라.

오고 가는 행(行)은 항상함 없으니

멸(滅)을 나타냄에 방일(放逸)함이 없어라.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의식이 있을 때 남긴, 사실상 석가모니 자신의 유언이었다.

是故, 比丘! 無爲放逸. 我以不放逸故, 自致正覺, 無量衆善, 亦由不放逸得. 一切萬物, 無常存者, 此是如來末後所說.

그러니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나니, 나의 한량없는 모든 올바름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연유하였을 따름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나니,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설법이니라.

최후에 사망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8섬 4말이 나왔는데,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 왕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어느 바라문이 중재하여 나눠 받았다고 한다. 뒤늦게 온 한 나라는 남은 재를 가져갔고, 조정을 맡은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전승에 따르면 이 바라문의 이름은 도로나 또는 향성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교의 영향을 받은 작품/용어

- 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

- 만화 디지몬 시리즈의 '샤카몬'

- 만화 '세인트 영맨'

- 만화 '원피스'의 '센고쿠'

- 만화 '최유기 리로드'

-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

- 고전소설 '서유기'

- 웹툰 '이말년 서유기'

- 웹툰 '헬퍼'

-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

- 영화 '쿵푸허슬'

- 영화 '신라의 달밤'

- 영화 '달마야 놀자'

- 영화 '나랏말싸미'

- 드라마 '화유기'

- 게임 '리그오브레전드'의 캐릭터 '리 신'

- 게임 '리그오브레전드'의 캐릭터 '카르마'

- 게임 '툼 레이더' 시리즈

- 게임 '검은 신화: 오공'

- 밴드 '너바나(nirvana)'

- 경주 석굴암 외 수많은 불상

- 경주 불국사 외 수많은 사찰

- 앙코르와트 등 수많은 랜드마크

- 여러 무속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편집 후기 : 진짜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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